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세송살이
심야 우울의 실타래가 온몸을 묶고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 말하면 무엇이 달라질까 밤마다 찾아오는 모진 미련은 삶의 끝자락 발버둥일까 어둠이 빛을 밝혀 더욱 어두워진다
저 포도는 실 거야 여우는 말했다 사실 포도는 시지 않다 그러나 포도는 시어야만 한다 그래야 여우가 포도를 두고 돌아설 수 있으니까 오늘도 마음의 나무엔 신 포도가 열린다
치매 치매는 우리가 사는 시간을 벗어난 병 아닐까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느라 현재에 집중하지 않을 뿐 아닐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행복했던 과거의 순간에 영원히 머물고 싶겠지 눈은 조금 흐릴지라도 그 안에 행복이 가득하길 바란다
낙하산이고 싶다 뛰어내리고 싶은 내 모든 소중한 사람들에게 내가 있으니 뛰어내려도 괜찮다고 내가 그대들 낙하를 안전하게 하겠다고 나는 뛰어내리는 그대들을 꼭 쥐고 찬찬히 풍경을 살피게 해야지 대지에 닿을 땐 발 끝부터 사뿐히 내려앉게 해야지 어느날 당신이 다시 뛰어내리고 싶어지면 등 뒤에서 안아주는 낙하산이고 싶다
만남이라는 건 가끔 5차원의 것처럼 느껴진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면 시작과 끝이 한 장면에 그려진다 시간이란 개념이 사라진 것 처럼 모든 장면을 동시에 바라본다 지난 연인과의 기억에 대입한 것일까 기억엔 순서가 없으니까 시작하지 않아도 끝을 알기에 만남의 행복보다 큰 이별의 아픔을 알기에 시작하지 않아도 가슴이 아리다 현재에 살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가 서로 뒤엉킨다 행복했던 장면만을 영원히 바라보고 싶지만 꿈 속에서조차 그 장면은 현재와 만나 비극으로 바뀐다 행복한 장면 하나라도 지키기 위해 떠올리지 않으려 애써야 한다 도망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다
가을 모질게 뜨거웠던 계절을 끝내고 풍요롭고 너그러운 계절을 피워낸다 대지는 달궜던 몸을 식히고 과수는 한해 결실을 맺는다 들판이 금빛 물결을 그리면 아이들은 멱을 감는다 동그랗고 까무잡잡한 얼굴을 한 아이가 알이 꽉 찬 옥수수를 크게 한입 배어 물고 배시시 웃는다 앵두같은 입술 사이로 하얀 이도 영근다 황금색 들녘 위로 초목이 춤추는 바람이 분다
후 하아얀 연기가 입 안에서 흘러나온다 구름을 닮아 두둥실 이내 하늘로 사라져 버린다 담뱃불은 울긋불긋 밤색 불쏘시개를 태우는데 입에선 흰 연기만 한가득 나온다 무엇이 그리도 희게 타고 있었을까 무얼 위해 그리도 희게 타버리신 걸까 홀로 태워버려야 했던 아버지 속엔 검정만 남았나 보다
오늘 아무개가 곧 어제가 될 아무개가 다음 아무개에게 자리를 넘긴다 넘긴 자리엔 무수한 어제들 흔적 가끔 떠나지 않으려 버텼던 흔적 아무개는 아무개인 걸까 하나의 아무개인 걸까 물어보고 싶어도 물을 곳은 없다 오늘의 아무개는 조금 더 자리를 지키고 어느새 창밖엔 아침이 드리운다
바람이 인다 고요했던 물 위로 어느새 늙어버린 내 어머니 눈가 주름처럼 수면에 물결이 번진다 그 주름 틈틈이 햇살이 쏟아져 잘게 비춘다 움푹 파인 그 눈가 주름마다 그득 채웠던 눈물이 반짝였을까 빛은 부서지고 부서지다 이내 요적하다